류큐왕국을 건립한 [쇼하시]를 따르며 류큐왕국 통일을 목표로 [쇼하시]와 함께 싸운 [호쿠잔(北山) 토벌]에서 공적을 올렸습니다. 그 후 나키진 성, 자키미 성, 나카구스크 성의 아지(성주)를 역임합니다. [축성의 천재]라고도 불리며, 그가 말년을 맞이한 나카구스크 성의 유적에서는 그의 대단한 축성 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6대에 걸친 왕을 모셨다고도 전해지며, 그 깊은 충성심을 통해서도 그의 인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390년 경, 야마다 성 성주의 셋째 아들로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 이름은 [마우시] 였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조상은 본래는 호쿠잔의 나키진 성 성주였으나 전쟁에 패하고 야마다 성의 성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운명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일족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앞서 말한 나키진 성 성주 [한안치]를 토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입니다. 이는 류큐왕국 통일을 위한 싸움 이었습니다. 츄잔의 군대에 참가하여 당시 따르던 [쇼하시]와 함께 나키진 성을 함락 시키는 것에 성공 했습니다.
1398년 교토 로쿠온지(절)에 킨카쿠(금각) 완공
1399년 오에이의 난
1411년 명나라에서 영락통보의 주조가 시작되었다.
1412년 잔 다르크가 출생
호쿠잔 토벌후, 고사마루가 나키진 성에서 호쿠잔 감시자로서 근무했던 기간은 겨우 수년 정도 였습니다. 요미탄 산에 있는 자키미 지역에 성을 쌓는 대로 요미탄 산에 돌아 가라는 [쇼하시]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키미는 약간 높은 지역이었으나, 지반이 약하기에 성을 쌓기에는 좋지 못한 장소 였습니다. 하지만 고사마루는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성주로 근무했던 야마다 성의 성벽을 재활용하거나 주변 섬에서 인력을 보충하면서 예상보다 빠르게 성을 완성하였습니다.
1428년 쇼쵸노토 봉기
1439년에 [쇼하시]가 승하하고, [쇼츄]가 3대 왕이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사마루는 나카구스크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츄잔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카츠렌 성주・아마와리를 감시하고, 슈리(류큐 왕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츄잔 성을 증축, 보강하고 공성전을 대비해 수로를 확보하는 등의 개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 후에 6대왕이 되는 고에쿠 성주 (쇼타이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며 그 입지를 더욱 굳혀 나갔습니다.
1438년 에이쿄의 난
1441년 가키쓰의 난
1431년 잔 다르크 처형
1444년 바르나 전투
끊이지 않는 왕권 교체와 [시로・후리의 반란]에 의한 슈리성 전소, 그리고 카츠렌 성주 였던 [아마와리]의 세력 확장에 의해 류큐왕국의 정세는 단숨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때 6대왕 [쇼타이큐]는 즉위 후에 안정을 되 찾기 위해 자신의 딸이며 고사마루의 손녀이기도 한 [모모토후미아가리]를 [아마와리]에게 시집 보내기도 하였으나 류큐 왕국 시대 최대의 미스터리라 불리우는 [고사마루・아마와리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1454년 교토쿠의 난
145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출생
1453년 백년전쟁 종결
1455년 장미전쟁
일설에 의하면 아마와리가 당시 국왕이던 [쇼타이큐]에게 [고사마루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라고 한 밀고가 사건의 발단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쇼타이큐]는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지만 신하에게 나카구스크 성을 정찰 시킨 결과,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있고 병사들을 훈련 시키는 등의 군사준비가 이루어져 있었기에 이를 [반란의 준비]로써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쇼타이큐]는 [아마와리]에게 [고사마루 토벌]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고사마루가 강화하고 있던 군사준비는 카츠렌 반도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아마와리]로부터 슈리 왕 정부를 지키고자 했던 것 이었으나 아쉽게도 오해가 풀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고사마루 토벌]의 무대가 된 곳은 두꺼운 성벽으로 증축하여 방어력을 높인 나카구스크 성 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추석 한창일 때 [아마와리]가 이끄는 정부군이 공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황한 신하들은 고사마루에게 응전할 것을 바랐지만 공격해 온 군대 안에 왕 정부의 깃발을 확인 하자 [왕을 거스르는 짓을 할 수 없다]라며 응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사마루는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모반을 꾀 하지도 않았기에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자살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고사마루의 셋째 아들 [모리치카]만은 유모와 함께 나카구스크 성을 탈출하였습니다. 유모는 자신의 고향인 이토만에 몸을 숨기고 일족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한편 고사마루를 공격한 [아마와리]는 그 후 [쇼타이큐]를 공격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와리]의 부인이며, [쇼타이큐]의 딸이고 더욱이 고사마루의 손녀이기도 한 [모모토후미아가리]와 그 신하였던 [우후우니쿠지쿠]가 이를 간파하여 카츠렌 성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에 의해 슈리 왕 정부를 제외한 류큐왕국의 2대 세력이었던 고사마루와 아마와리는 거의 같은 시기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고사마루・아마와리의 반란] 이후 [쇼타이큐]가 승하하고 7대왕으로서 [쇼토쿠]가 류큐왕국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쇼토쿠]는 폭군이었기에 류큐 왕국의 정세가 악화 되었습니다. [쇼토쿠]가 승하 한 뒤 류큐 왕국의 재건이 이루어지고 슈리 왕 정부로부터 숨어 지내던 [가네마루]가 왕위를 계승하여 [쇼엔]왕이 되었습니다. [쇼엔]왕은 고사마루의 셋째 아들인 [모리치카]가 이토만 구니요시에 숨어 지낸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모리치카]를 슈리 왕 정부에 맞이하였습니다.
1467년 오닌의 난
1582년 혼노지의 변
1479년 스페인 왕국의 성립
1644년 명나라 멸망